나의 업

2026.10.3 · 오전 08:22

지난 3개월 간 나는 정지 상태에 있었다. 처음에는 의도한 멈춤이었다.

나에게 '더 쉬운' 일은 계속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기존 제품을 개선하고, 새로운 기능을 붙이고, AI와 함께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것. 오늘 하루 '뭔가 했다'는 성취감이 있으니, 원하는 지표가 안 나와도 계속할 만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만드는(building) 행위만 반복하는 것은 지금 내게 필요한 중요한 질문을 회피하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걸 진짜 하는 게 맞아?"
"내가 정말 해야 할 건 뭘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이 들더라도, 일단 모두 멈추고 이 질문을 제대로 마주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멈췄다.

하지만 그 의도된 멈춤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난 몇 년간의 시도가 결실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내 안에 "뭘 해도 왠지 안 될 것 같다"는 무기력이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최근에 내가 개인적으로 내린 어떤 선택과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큰 고통이 되어 돌아온 경험도 덧대어졌다.

내가 내리는 모든 선택에 불신과 두려움이 크게 자리 잡은 것 같다.
나의 선택과 의사결정을 못 믿어,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지금의 모습이 느껴진다.
나는 후회나 실패를 하지 않을 선택을 찾느라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방금 그걸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을 조금 더 해보니, 내가 잃어버린 게 하나 더 있었다.
시도해 보는 즐거움.

언제부턴가 나는 무언가를 시도할 때마다 결과를 미리 기대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도 필요할지 모른다는 가설로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내가 쓴 시간과 노력이 어떤 식으로든 성과로 돌아오면 좋겠다는 바램이 앞서버려,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들면 이내 실행을 멈추어 버렸다.

"이거 한번 해보면 어떻게 될까?"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시작하기도 전에 될지 안 될지를 판단하고 멈추려 한다.

솜털처럼 가볍게 질문하고 가설을 확인하며 나아가도 될 일인데,
마음속 기대와 중압감이 그 위에 쌓여 어느 순간 들고 가기 무거워져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포기하고 주저앉기를 반복하다 보니, 결국 어떤 시작도 이어가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품을 만드는 건 어쩌면 성공과 실패를 판정받는 시험이 아니라,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정말 이런 문제가 있을까?"
"이렇게 해결해주면 도움이 될까?"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주면 사람들이 사용할까?"

궁금하면 작은 걸 하나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아보면 된다.

사람들이 쓰면 하나의 답을 얻은 것이고, 아무도 쓰지 않아도 하나의 답을 얻은 것이다.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면 그것도 답이다.

해봤는데 아니면, 적어도 하나는 알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요즘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창작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영화든, 영상이든, 글이든.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건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왜 이게 마음에 걸리지?"
"이런 삶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작품을 통해 꼭 누군가를 감동시켜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질문 하나를 세상에 던져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울림이나 깨달음을 주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있다.
누군가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주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도 여전히 있다.

그런데 그걸 매번 내가 만들어내야 하는 '결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그건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두고,
지금의 나는 질문을 던져보면 된다.
가설을 검증해보면 된다.

어떤 질문은 글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질문은 영상이나 영화가 될 수도 있고,
어떤 가설은 제품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작품을 만들고 싶은 건지, 제품을 만들고 싶은 건지 굳이 지금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냥 무언가를 만들어 세상과 대화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작품은 질문을 담는 그릇이고,
제품은 가설을 검증하는 도구다.

둘 다 내가 궁금한 것을 세상에 내놓고, 세상이 무엇이라고 답하는지 들어보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걸 좋아했던 것 같다.

"어? 이거 한번 해보면 어떻게 되지?"

궁금해서 만들어보고,
내 생각과 다르면 왜 그런지 생각해보고,
몰랐던 걸 하나 배우고,
그러면 또 다른 게 궁금해져서 다음 것을 만들어보는 것.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과정 하나하나에 성공과 실패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정작 그 즐거움을 잊어버렸다.

지난 3개월 동안 멈춰 있었던 것도 어쩌면 실패가 두려워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실패하지 않을 선택을 찾고,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는 일을 찾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생각하다 보니,

질문을 던지고 답을 궁금해하며 직접 해보는 일을 너무 오래 멈춰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해보려고 한다.

처음부터 옳은 선택을 하려고 하지 않기로 한다.
성공할 것 같은 것만 골라서 시도하려고 하지도 않기로 한다.

질문이 생기면 작게 만들어본다.
가설이 생기면 작게 검증해본다.
세상의 답을 한번 들어본다.

그러면 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답을 가지고 다시 질문하면 된다.

실패할 수도 있다.
후회할 수도 있다.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까지 감수하고 다시 시도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실패 없이 성공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보다,
계속 궁금해하고, 만들고, 세상에 내놓고, 답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질문하고,
만들고,
내놓고,
배우고,
다시 질문한다.

그게 내 삶이라 정의하고, 오늘부터 다시 움직인다.